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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살림살이의 대원칙, ‘나눔’ ‘비움’ ‘섬김’ [글로벌생명학] 4 : 생명의 패러다임을 찾아서 2020-08-17
이기상 edit@catholicpress.kr


“땅은 하늘의 음덕을 거스르지 않았다. 한 번 땅에 떨어진 싹은 두말없이 품고 있다가, 욕심 없이 지표로 토해 냈고, 묵묵히 자신의 젖을 먹여 살지게 길러 주었다. 거둔 뒤에 누구의 것으로 몫 지어지든지 아무 상관없이 탐스럽게 알곡을 채워 주는 땅은, 곡식과 식물과 산과 강의 어미였다. 땅에 떨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썩는다. 땅이 무엇을 거부하는 것은 본 일이 없다. 사람이나 짐승이 내버린 똥, 오줌도 땅에 스며들면 거름이 되고, 독이 올라 욕을 하며 내뱉은 침도 땅에 떨어지면 삭아서 물이 된다. 땅은 천한 것일수록 귀하게 받아들여 새롭게 만들어 준다.” (최명희, <혼불> 중에서) 


<혼불>에는 한국인의 땅에 대한 생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작가 최명희는 1995년 시카고 대 초청 강연에서 <혼불>의 집필 동기를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사물의 본질에 숨어있는 넋의 비밀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혼불에서 그 비밀의 열쇠를 찾아낸 것이다. 혼불은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으로, 목숨이자 마음이다. 우주의 질서에 따라 자연을 섬기고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혼불인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쉬운 우리말로 표현해본다면, ‘살림살이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살림살이 정신은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배우고 따랐던 삶의 도리이자 실천 덕목이다. 


동서양 자연관의 차이, 관리인 vs 살림지기


지금으로부터 백만 년 전 인간은 이 지구 위, 자연 속에 내던져졌다. 오랜 기간 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 나름대로의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된다. 대략 오천 년 전쯤 인간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자연관을 글로 남겨 후대에 전해준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동서양의 자연관을 담고 있는 것이 <창세기>와 <도덕경>이다. 


먼저 <창세기>에 담긴 서양의 자연관을 살펴보자. <창세기> 1장 28절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지어내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사명을 내려주고 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에게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사람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자연에 대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양철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제작은 자연이 완성하지 못한 것을 완성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창세기>와 같은 선상에서 자연을 마음껏 이용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에 동아시아의 자연관을 기록한 노자의 <도덕경>을 살펴보자. 노자의 <도덕경> 25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는 스스로 그러함(자연[自然])을 본받는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인간이 따르고 본받아야 할 도리를 땅에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윤두서 < 경답목우도 >


이처럼 동서양의 자연관은 매우 다르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고, 동양은 인간이 맞춰나가야 할 삶의 기준으로 생각했다. 서양에서 땅의 지배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동아시아의 우리들은 땅을 본받음의 거울로 삼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서양의 자연관도 변하고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은 <유러피안 드림>에서 유럽인들이 자연을 대하는 방법을 바꾸고 있음을 지적한다. <창세기>를 새롭게 해석한다고 소개하면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관리인’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정복이나 지배의 태도가 아니라 보살피고 돌보는 관리정신으로 자연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삼 관리정신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애초부터 살림지기 정신으로 살아왔으니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서 가져야 할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살림지기’로 표현했다.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 살림을 천직으로 알고 생활하는 사람이 살림지기다. 살림지기 정신은 관리정신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더 뿌리가 깊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정신을 잊지 않고 되새기기만 하면 된다. 


살림살이의 지혜 : 삶을 알고 살림을 실천하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별들도 생명의 에너지를 불태우다 그것을 다 태우고 나면 우주의 텅 빈 공간 속으로 사라져 죽는다. 이렇듯 삶이라는 것은 생명력을 불태우는 사름을 뜻한다. 우리말 ‘사람’은 ‘삶’에서 나왔다. ‘삶’에는 ‘사르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늘로부터 받은 자기 생명의 에너지를 사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단순히 자신의 생명력을 사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생명력의 교감을 나누는 존재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는 다른 빼어난 능력을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살림을 아는 능력이다. 즉 삶을 이해하는 능력,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어떻게 살면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 그래서 잘될 수 있는지, 잘된 사람, 참사람이 될 수 있는지 등등의 살아가는 법을 아는 존재로서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삶의 법칙을 아는 존재다.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이렇게 삶을 안다는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삶 + 앎’이 합쳐진 것이 ‘사람’이다. 인간만이 삶을 알고, 삶을 살리고, 그래서 모든 생명체를 책임질 수 있는 특별한 살림의 역할을 떠맡은 존재다. 살림살이가 바로 사람의 본질인 것이다. 


‘살림’이라는 낱말은 ‘살리다’에서 나왔다. ‘살리다’는 ‘죽지 않도록 하다, 어떤 생활을 하게 하다, 없애거나 깎지 않고 그대로 두다, 꺼지거나 죽은 부분을 볼록하게 살게 하다’라는 말이다. ‘살림’은 ‘한 집안을 이루어 생활하는 일, 살게 하는 일’이고, ‘살이’는 ‘살아가는 일’이다. 이렇게 ‘살림살이’는 ‘살림을 생활화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인간이란 바로 이렇게 살림을 생활화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한국인의 삶의 문화 속에는 이러한 ‘살림살이의 원칙’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우주 살림살이의 대원칙 : 생명의 얼[한얼]을 섬기는 것


우리 선조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고정된 ‘있음’을 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되어 가는 ‘살아있음’을 보았다. 살아있음은 정지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이며 ‘되어 가는’ 것이다. 모름지기 생명체는 그러한 생명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잘 되어 가야 하며, 살림을 생활화해야 하는 사람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생명의 원칙을 잘 따르는 사람을 ‘된 사람’이라 부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못된 사람’이라 부른다. 우주적 생명사건에 동참하며 잘 되어 가는 생명체는 자신을 고집하지도, 공간에 집착하지도, 시간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늘과 땅 사이에 자신을 내맡기며 되어 감[변화]의 원칙을 따른다. 


▲ 김홍도 < 금강사군첩 - 경포대 >


이 ‘되어 감’의 원칙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비움’이며 없어짐이며 사라짐이다. 되어 감에서 우주 현상의 본질적인 차원을 감지했을 때 거기에서 부각될 수 있는 근본개념은 ‘있음[존재]’이 아니라 ‘없음[無, 空]’이다. 있음이란 없음과 없음을 잇고 있는 순간적인 연결고리일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에서 생겨나 주어진 삶의 에너지를 불사르며 존재 속에서 되어 가다가 에너지를 다 소진한 뒤에는 다시 무 속으로 사라져 간다.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있음’이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이러한 ‘없음’이 경탄과 사색의 대상이었다. 무수한 별무리들을 다 감싸 안고 있는 저 무한한 천공이, 한없이 너르며 시간 속에서도 한결같이 늘 그러한 하늘[한늘 = 끝없이 크고 늘 그러한]이 놀라움과 경배의 대상이었다. 


온갖 것을 다 살게 하고 있는 저 광활한 빈탕한 데[虛空]는 분명 없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있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은 이러한 ‘없이 있는 것’에 매료되었다. 우주적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분명 이러한 없이 있는 어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을 ‘하늘님[하느님]’이라고 숭배했다. 우리는 하느님의 ‘없이 계심’에서 살림살이의 원칙을 유추해낼 수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모든 것에서, 특히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서 하늘의 명(命)인 얼을 알아보고 그것들이 그것들로서 따로 서서 사이를 나누면서 그것들의 되어 감이 잘 전개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것으로서 서도록 도우면서 우리는 없이 계신 한얼을 섬기는 것이다. ‘섬김’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서 그 자신으로 서서 우주적 생명의 전개과정에 편입되도록 관여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한얼’을 알아보고 모시는 것이다. 


한국인의 자연관에 담긴 생명 사상 : 나눔과 비움


한국인들은 자연 속에서 서양 사람들은 보지 못한 생명의 법칙을 보았다. 그것은 자신을 나누고 비워서 다른 생명을 살려나가는 살림의 원칙이다. 아주 작은 세포인 아메바에서부터 새싹을 포함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나누며 자란다. ‘나눔’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 태어나서 갈라져 나오고 갈라지며 나뉘면서 자라나간다는 의미가 있다. 끊임없이 나뉘는 것이다. 나뉘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도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갈라지고 나뉘어져 우주의 잠재적인 생명력 속으로 사라진다. 바로 나눔이다. 


나눔의 맨 마지막 단계에는 ‘비움’이 있다. 서양에서는 자신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욕구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을 짓밟고 다스리고 죽여야 하는 차원에 강조점을 두었다. 이와는 다르게 한국인들은, 사람이란 종국에는 자신을 비워 우주의 텅 빔 속에 자신을 던져 새로운 생명에게 자신을 준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는 비움이 중요했다. 한국인의 영성은 우주의 텅 빔 또는 하느님의 없이 계심에서 그 없음을 본받아 나 자신을 나누어서 비우는 삶의 방식에 그 핵심이 있다. 


‘산다’는 것은 큰 눈으로 멀리 볼 때 자신을 살라 버리고 없애 버려 우주적 생명의 얼에 동참하는 것임을, 그렇게 자신을 가르고 나누어 우주적 생명을 살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누다’는 나서 갈라져 나가고 또 나서 갈라져 나가는 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가르고 나누어 생명의 전개과정에 동참하는, ‘사이를 나누는’ 살림살이의 대원칙이다. 새롭게 나서 그 자신으로 서서 자신의 고유한 생명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생명을 나눠 갖는 것이 곧 ‘나눔’이다. 


갈라지지 않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생명의 질서, 생명의 흐름, 숨돌이와 피돌이를 막는 자이다. 자신을 나누어 갖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자기를 비우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생명의 반역자들이다. 이렇게 ‘나눔’과 ‘비움’은 우주 살림살이의 대원칙이다.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세상에 없지. 껍데기만 살었다고 목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살어 있으면서도 죽은 것은 제가 저를 속이는 것이야. 살어 있다고 믿고 있지만 실상은 죽어 버린 것이 세상에는 또한 부지기수니라. 어쩌든지 있는 정성을 다 기울여서 목숨을 죽이지 말고 불씨같이 잘 보존허고 있노라면, 그것은 저절로 창성허느니.” (최명희의 <혼불> 중에서)



▶ 지난 편 보기






[덧붙이는 글]
< 생명의 패러다임을 찾아서. 죽임의 문명이 아닌 살림의 문화를! >, 『경향잡지』 2012년 4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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