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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이 ‘화면’에 등장할 때 [전문] 그레고리 솔라리 칼럼, ‘진정 없는 것’ 끌로셰 2020-04-14 17:5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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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결국에는 사회적 연대만큼이나 ‘실제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는 성사의 문제에 한정해보면, 원격 미사를 이용하는 사목은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성사를 집전한다는 미명 하에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주님보다는 일종의 성직자중심주의인 셈이다.” - 그레고리 솔라리(Grégory Solari)


1965년 스위스 제네바의 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레고리 솔라리(Grégory Solari)는 1986년 가톨릭교회에 입교했다. 1992년부터 파리에 위치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례에 관한 논문과 책을 펴냈다. 


솔라리는 현재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추기경의 사상에 대한 철학 박사논문을 집필하고 있다. 


다음은 < La Croix > 블로그에 지난 4월 6일 게재된 솔라리 칼럼 전문 번역이다.



▲ (사진출처=Vatican News)


‘판데믹’과 ‘봉쇄령’이라는 두 단어가 화면과 온라인 대화, 심지어는 밤을 뒤흔드는 악몽에서도 눈을 찌르듯 환히 밝히고 있다. 사회생활의 극단적인 제약 없이는 이러한 세계적 위기의 탈출구가 없음을 설명하기 위해 보건당국, 정계, 교회의 담화가 줄을 잇고 있다. 이는 다른 동물보다도 더욱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 존재의 결핍을 드러내주는 필수적인 관계의 박탈인가? 형제와 성체성사의 실제적인 현존과 멀리 떨어져 살아가라는 호소를 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번 성주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사목자 형제들에게 보내는 청원의 형태로 필리프 베카르(가톨릭 신학자 - 역자주)와 협의한 몇 가지 제안을 내놓고자 한다.


막다른 길에서 연대하는 이


봉쇄령은 사회적 연대라는 사목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또는 ‘시민적 거리’는 개인 간의 접촉과 공동체가 모이는 일을 축소시키고, 나아가 가로막는다. 하지만 우리는 잘 견뎌내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가 ‘연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픈 사람들, 피해를 입은 가정, 고통 받고 있는 세상과 연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요즘처럼 모든 사회적 접촉이 가로막혔을 때조차도, 멀리서라도 모든 것에 연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봉쇄령은 ‘신학적 연대’(성체성사적 친교)라는 사목에도 장애물이 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연대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연대는 ‘열망’의 친교로 자라나며, 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되는 미사가 멀리서 이러한 친교의 동력이 되고 있다. 일상적으로 성체성사를 할 수 없는 이들과 더불어 공동체가 없는 미사 또는 인터넷 미사 집전에서 일상적으로 성체성사를 할 수 있는 사제들과도 연대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봉쇄령


봉쇄령은 오늘날 두 가지를 폭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모든 접촉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현대 가톨릭교회의 특징인 사회적 연대와, 신학적 연대라는 두 사목적 입장이 적어도 조롱을 피하려면, 더 나아가 이념으로 의심받는 일을 피하려면 자기 행실을 재고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결국에는 사회적 연대만큼이나 ‘실제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는 성사의 문제에 한정해보면, 원격 미사를 이용하는 사목은 무엇으로 귀결되는가?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성사를 집전한다는 미명 하에서 화면에 나타나는 것은 주님보다는 일종의 성직자중심주의인 셈이다. 사람들은 열망의 친교보다는 결핍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며, 이는 이런 식으로 대상화된 미사 집전이 피해갈 수 없는 ‘관음증’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여기서 성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버린다. 성사가 집전되면, 제도교회는 적어도 현실에서는 아니더라도 SNS 상에서라도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사제는 성체성사를 위한 존재다’라는 이미 논쟁적인 격언을 믿어온 사람들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오늘날 이를 ‘성체성사는 사제를 위한 존재다’라고 치환하게 된 일은 더욱 심각하다. 


사목이 화면에 등장할 때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제 중심의) 사목이 보편교회의 교도권과 성사의 본질, 특히 성체성사의 본질 탓이라고 비난하는 간극이다.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던가? 제도교회를 위해? 보편교회를 위해? 성체성사가 성체성사를 위해 집전되는 것 마냥 성사가 자기 안에서 그 목적을 찾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안식일은 물론 성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위해 이곳에 오셨다. 자기 제자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오셨다. 우리와 일치하기 위해, 연대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이름인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이미지가 보여주듯, 사도들이 없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친구들’이라 부르는 이들이 없는 최후의 만찬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최후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고, 누가 그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실 것이며,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지는 자기희생은 누가 받을 것인가? 원격 미사 집전은 하느님의 이름이 두 번이나 거짓을 고하게 하는 것 말고 무슨 효과가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는 공동체가 없이 진행되는 비공개 미사라는 점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다. 친교의 표시도 없다. 미사가 화면에서 집전된다는 점에서는 두 번째 벌어지는 일이다. 이는 미사가 화면에 나타나기 때문인데, 즉 미사가 사이에 놓인 존재, 무언가를 숨기고 가리는 것 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로막는’ 것에 성체성사가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한계에 다다른 성사주의


이러한 사목적 선택이 드러내주는 것은 ‘신비’에 대한 신학적 담화와 신비에 대한 찬양의 특징인 성사주의의 한계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체성사를 ‘양식’으로 이해함으로서 성사신학의 균형을 바로 잡았다. 희생과 성사를 구분함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반복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십자가 희생과 우리 성사의 핵심이자 은총의 행위로서 그리스도께서 남김없이 생명을 바치신 일을 다시금 결부시킬 수 있게 해주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을 받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에는 미사 참례 또는 열망의 친교가 성체성사를 대신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공동체 전체의 능동적인 참여와 함께 성체성사적 친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트리엔트 미사(Forme extraordinaire)에는 친교의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미사에서든 아니든) 사제의 영성체 후에 신자들에게 영성체가 분배되며, 사제의 영성체는 회중의 영성체와 무관하다. 원격 미사는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원격 미사는 추상적인 성사주의(열망의 친교)와 그와 짝을 이루는 성직자중심주의를 다시 도입하고 있다. 


간극이 생긴 교회론


특히 원격 미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자취를 따라 개방한 사목적 토대인 ‘공동합의성’을 무시하고 있다. 교회 생활로서 공동합의성은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가? 바로 공동체, 즉 하느님의 백성, 세례 받은 성스러운 백성에 기반하고 있다. 각자의 은총을 받은 신자, 사목자는 존엄성과 성스러움에서 차이가 없다. 세례는 신자로 하여금 교회 생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고, 이들에게 세례의 직무를 부여하고 이들에게 ‘신앙 감각’을 부여한다. 


취임 이후로 계속해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회 개혁이 이러한 공동합의적 회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상기시켰다. 이러한 회개에는 많은 것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형이상학’과 형이상학의 개념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것과 같이 성직자중심주의의 특징인 추상적 ‘성사주의’에서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러한 탈출은 (신자와 사목자라는) 이분법으로 하여금 카리스마와 제도화된 직분을 재고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에클레지올라(Ecclesiola, 라틴어로 ‘작은 교회’라는 의미 - 역자주)


그렇다면 이러한 조건에서 신자들과 거리를 유지하고 이처럼 교회를 이분법에 따라 과거의 방식으로 표상하는 대신 이러한 봉쇄령을 계기로 성체성사를 원하는 신자나 가정에 전달하는 것은 어떠한가? 봉쇄령을 계기로, 사목자와 사목자에 의해 사목자를 위해 고안된 사목에 대해 신자들을 수동적인 입장에 묶어두기 보다는 신자들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어떤가? 어느 정도 일관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을 칭찬하고, 세례 받은 이들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목소리 높여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가정의 아름다움을 옹호하면서,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 가정이 작은 가정 교회, 즉 에클레지올라(Ecclesiola)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더 이상 문이 잠긴 교회의 고독이 아니라, 성체성사를 받아들임으로서 거기에서 이러한 고난의 맹렬함 속에서도 힘을 찾고 세상, 동네, 시골 중심에서 수난 감실이 되어줄 수많은 가정에게 가져다 줄 ‘은총의 무게’가 상상되는가? 


누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인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엠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태초부터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위하시는’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머문다는, 즉 자기 백성 모두와 함께 머문다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은 모순될 수밖에 없다. 성사에 대한 건강한 개념은 그리스도교 가정에 이러한 주님의 ‘양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로막기는커녕 오히려 함의한다. 


물론 앞으로 규정될 조건 속에서 이것이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우리는 여기서 원칙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느 정도 현실적일 필요가 있다. 제도교회에는 무엇이 남는가? 사목계획, 오늘날에는 사라진 교회 구조와 사회 구조에서 물려받은 지역 조직에는 무엇이 남게 될 것인가? 여기서는 수도원 공동체를 교회의 패러다임으로 강조한 베네딕토 16세와 공동합의성을 교회의 패러다임이자, 교회의 생활과 행실의 패러다임으로 강조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조해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그들 가운데’ 그분께서 서시기 위해


부활이 다가온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신다. 무덤을 통해서 그러하셨듯이, 그분의 부활이 이를 모든 화면을 통해 전달되기를 바란다. 이를테면 완전 봉쇄령이 내려지지 않은 프랑스어권 스위스 지역에서라도 중앙 감실에 혼자 머물고 계신 그분에게, 우리와 언제나 함께 있기를 바라시는 그분에게 문을 열자. 그분께서는 공동체, 형제자매와 언제나 함께 있기를 바라신다. 


형제 사목자들이여, 이제 여러분이 벗어나 달라. 여러분의 경당에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달라. 성체성사를 가정에 전해주고, 이를 통해 주님께서 홀로 계시지 않게 해 달라. 부활 때에 진정으로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 19)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필진정보]
끌로셰 : 언어문제로 관심을 받지 못 하는 글이나 그러한 글들이 전달하려는 문제의식을 발굴하고자 한다. “다른 언어는 다른 사고의 틀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사회 현상이나 문제는 주조에 쓰이는 재료들과 같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의식은 같은 분야,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쓴다고 해도 그 논점과 관점이 천차만별일 수 있습니다. 해외 기사, 사설들을 통해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정보 속에 담긴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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