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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개념으로 거머쥘 수 없는 존재다 [이기상-신의 숨결] 다석 류영모의 텅빔과 성스러움 ② 이기상 2019-12-16 12: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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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하늘’을 본 삼아 사유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하늘은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포함하는 쪼개질 수 없고 나뉘어질 수 없는 온전한 전체라고 파악하였다. 서양의 종교발달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즉시 다음과 같이 토를 달아 해설할 것이다. 인류의 시작에 인간의 종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하늘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고. 그렇지만 그런 하늘 신, 땅 신, 물 신, 나무 신 등과 같은 유치한 신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경험과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극복되어 우주 창조의 신으로서 유일신 사상으로 발전되어 나왔다고. 그리스도교에서 볼 수 있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 사상이 인류 발전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이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발달된 종교 형태라고 말이다.


신이 있을만한 성스러움의 솟터가 있는가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교의 신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사상가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양의 잘못된 신관을 비판하며 ‘신의 죽음’을 선포한 니체를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현대에 만연된 비종교, 반종교, 무종교 운동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교의 배타적인 교리와 협소한 신관에 기인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하느님을 특정 종교의 교회탑 안에 가두어둘 수 없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특정 관념으로 붙들어 놓을 수 없다. 하느님은 개념으로 거머쥘 수 없는 존재다. 개념에 잡힌 하느님은 진정한 하느님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오만이 하느님을 개념 속에 붙잡아 놓고 자신의 안정과 평안을 위해 신마저도 이용한 것은 아닌지, 아직도 계속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이성의 차가운 개념의 틀로 붙잡힌 신이 과연 본래의 ‘신다운 신’일까? 이러한 오만의 극치로 말미암아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신을 죽이기 전에 이미 신은 인간 세상을 떠나갔다. 신이 있을 만한 성스러움의 솟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성에 의해 모든 것이 투명하게 설명되어 버린 세계 안에 신비스러운 신의 비밀이 나타날 수 있는 곳은 없다. 인간의 편함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세속화된 세계에서는 신마저도 인간의 편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무한한 경쟁과 무한한 소유를 부추키며 고무풍선처럼 욕망을 한없이 부풀리고 있는 욕망의 나라에는 신이 머무를 자리란 없는 법이다. 


▲ 1978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 고도를 기다리며 > 공연 중 (사진출처=Gallica BnF / Fernand Michaud)


이렇게 욕망의 네온사인이 거리를 수놓고 있는 환락의 세상은 실은 신이 떠나버린 칠흑 같은 어둠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오직 떠나간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떠나간 신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이 나타날 수 있는 성스러움의 영역을 예비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성스러움의 영역을 예비해야 하는가?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사유는 존재의 진리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사유한다. (…) 존재의 진리에서부터 비로소 성스러움의 본질이 사유될 수 있다. 성스러움의 본질에서부터 비로소 신성의 본질이 사유되어야 한다. 신성의 본질의 빛 속에서 비로소 ‘신’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이름해야 하는지가 사유되고 말해질 수 있다.”


신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털어 버리고


우리의 좁은 존재이해의 지평이 우리의 삶에서 신을 몰아낸 것이 아닌지를 반성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존재사건의 마당이다. 그 마당이 하느님이 나타나기에 너무 좁고 너무 더럽다면 하느님은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존재마당이, 존재시각이 하느님을 쫓아낸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정적으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기여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서양의 철학과 신학에서는 존재를 ‘무에서 창조’라는 관점에서 보았는데, 거기에는 암암리에 ‘제작’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모델로서 자리잡고 있었다. 신은 아주 유능한 제작자이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우주만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전능하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부터 우주를 창조하였다고는 하나 어쨌거나 거기에 신은 있었던 것 아닌가? 


시작부터 어려운 모순에 걸리는 것은 ‘존재’에 대한 이해 때문에 그렇다. 아무튼 신은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고의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제일원인이며 최종근거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였으면서도 그 자신은 영원히 계속 존재해온 자기존재의 자체 원인이기도 한 그런 존재자이다. 하이데거는 이와 같은 잘못된 존재이해가 신을 죽이고 신을 이 세상에서 몰아내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누가 그런 제일원인이며 최종근거이며 자체원인인 신에게 무릎을 꿇고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희생을 하려고 하겠느냐고 묻는다. 그것은 신성함이 차가운 합리화의 논리에 따라 사라져버린 이성이 만들어 놓은 ‘가짜 신’일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신의 ‘있음’도 담을 수 있는 더 넓은 트인 터가 필요하다. 과연 무한하고 영원한 신을 담을 수 있는 터가 있는가? 우리는 이제 발상의 전환을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갖고 있었던 신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털어 버려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한계 짓는 ‘있음’의 지평이, 신이 나타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계가 없는 ‘있음’, 시작과 끝이 없는 ‘있음’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있음’ 자체가 있음의 지평 안에서만, 즉 공간과 시간 안에서 테두리지음에 의해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러한 있음 속에 하느님을 담을 수는 없다. 테두리지어지지 않은 있음, 한계가 없어 사방팔방 무한히 열린 있음은 한마디로 ‘빔’이다. 텅빔이며 빈탕한데이다. 있음의 관점으로 보자면 없음인 ‘무’이다. 이 텅빔과 무가 이제 하느님의 나타남을 예비할 성스러움의 솟터는 아닌가?


▶ 다음 편에서는 ‘텅빔과 성스러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 지난 편 보기


⑴ M. Heidegger, < Brief über den Humanismus (인문주의에 대한 서한) >, Wegmarken (사유의 이정표), Frankfurt am Main 1967, 181 이하.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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