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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 많은’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영역 [이기상-신의 숨결] 허무주의 시대 신(神)의 자리 ② 이기상 2019-09-16 13: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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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할 수 ‘있음’과 경험할 수 ‘없음’의 차이


있음의 기준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경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임이 어느 정도는 암시되었다. 인간은 흔히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것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이 만능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현대에 와서는 더욱 그렇다. 20세기 초반 과학의 오만은 극에 달해 “과학에 의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란 없다”고 큰소리치기에 이른다. 어느 우주인이 처음으로 우주 공간을 다녀와서 “우주에도 신은 없더라”고 말한 발언은 이런 오만함의 한 표식일 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없음 앞에서 솔직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힘들다. 그것은 없음이 간직하고 있는 힘과 그것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우리는 우선 대개 본능적으로 없음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 우리는 낯익은 [아는] 것, 이해 가능한 것, 설명 가능한 것에 둘러싸여 있을 때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낀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불안의 상태를 싫어하여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없음에 대한 닫힌 마음을 열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지 그것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는 신이 아닌 주제에 마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오만을 떤다. 이렇게 우리 경험의 한계를, 즉 경험에 끝이-있음을 인정할 때 없음[무]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이 ‘없음’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다음 이러한 경험할 수 ‘없음’도 적어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먼저, 아직은 여러 가지 여건상 ― 이를테면 과학기술이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해서 ― 경험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경험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의 경험을 완전히 벗어나 있어서 결코 경험할 수 ‘없음’도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경험’을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따라 이 모든 논의가 서로 다른 양상과 깊이와 너비에 도달한다. 학문적인 논의에서도 ‘경험’의 폭에 대한 시각은 일정하지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경험’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폭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철학 또는 학문의 주제와 방법이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칸트(I. Kant)의 경험 개념은 “수학적 자연과학”에 방향성을 두고 있다. 칸트의 “경험 개념”에 따르면 “신”은 결코 경험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신은 세계 속에서 자신을 열어 놓지 않는다”(『논리 철학 논고』 6.432)고 말함으로써 신에 대한 “경험”의 한계를 지적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그에게는 오직 과학적 영역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헤겔(G.W.F. Hegel)은 “경험 개념” 속에 “의식의 경험”까지 포함시킴으로써 학문으로서 성립 가능한 영역을 칸트보다는 넓혔다. 그런가 하면 니체(F. Nietzsche)는 아예 “경험 개념”의 한계를 철폐하여, 경험을 “정밀 학문”의 한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와는 다르게 후설(Edmund Husserl)은 “엄밀하면서 동시에 너비에서 무제한적인 경험 개념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가다머(Hans-Gerog Gadamer)의 경험 개념에 따르자면, 경험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직접적으로 주어진 됨됨이(소여성)”이다. 그러나 이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들 또는 “세계의 개방성”, 즉 “경험 가능한 영역 전체의 개방성”이다. 이때의 세계는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언어의 본질에 따르자면, 언어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사태를 직접적으로, 즉 투명하게 매개할 수 있다. 따라서 “언어에 의한 매개”는 결코 “경험의 직접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말이 잡담에 가까워지면, 언어는 더 이상 투명하지 못하다. 또 초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경험은 소위 “반성”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만일 “반성”이 “논리적 추론”을 뜻하는 한, 그것은 결코 “직접적 경험”이라 불릴 수 없겠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직접적 경험들”을 숨기고 있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한, 그것은 오히려 “직접적 경험”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 된다. 


본래적 경험이 갖추어야 할 근본요소


벨테는 이렇게 경험에 대한 논의들을 정리하면서 그것이 갇혀 있는 좁은 울타리를 깨어야만 인간의 본래적인 경험에 합당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종교적 경험, 예술적 경험까지를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러한 본래적 경험이 갖추어야 할 근본요소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든다.


먼저 경험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음”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경험된 것’은 스스로, 경험을 갖는 자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직접성은 다양한 단계와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예컨대 경험된 것의 직접성은 결코 인지되지 못한 채 숨겨져 있을 수도 있고, 또  심지어 위장되거나 몰아내진 채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현존하여 나타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직접성은 거꾸로 밝게 환기된 주의 속에서도 놓여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주의의 폭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처음부터 충족시킬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많은 가능적 정도들과 단계들 그리고 변형들이 주어진다.


경험된 것의 ‘직접적으로 주어져 있음’은 결코 ‘단순히 감각적으로 주어져 있음’으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순수한 감각, 이를테면, 순수한 봄 또는 순수한 들음 또는 순수한 냄새맡음은 결코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각각의 감각 기관들에게 주어지는 것들은, 따로따로 그리고 단지 그렇게 주어진 것으로서만 고찰해 보았을 때, 어떤 추상의 과정을 통한 매개의 결과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순히 색깔적인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물리학적으로 이해된 빛만을 보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히려 문제거리들과 사태들 그리고 사태연관들을 본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들이다. 우리의 봄은 들음이나 다른 감각 기관들의 작용과, 우리가 생각함이라 부를 수 있는 바의 것으로부터 따로 떨어진 순수한 봄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전체적으로 열려 있다. 이러한 전체적 열려 있음은 물론 풍부하게 구조화되어 있다. 바로 이 전체적 열려 있음은 ‘첫번째로 주어진 것’, 즉 직접적인 것이다.


우리는 봄, 들음, 생각함 등을 서로 다른 것들로 구별하는 버릇이 있다. 이러한 것들로 구별되는 것은 직접적인 것, 즉 매개되지 않은 것, 그리고 모든 이차적 구별에 앞선 것, 즉 “세계를 향한 열려 있음”과 “우리를 향한 세계의 열려 있음”이다. 이러한 이중적 열려 있음은 하나의 포괄하는 전체성의 성격을 갖는 열려 있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열려 있음에서 세계적 차원의 사태 연관들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이 연관들은 직접적인 것, 따라서 직접성의 의미에서 경험하는 자에게 경험으로서 허락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험은 전체적 성격을 갖는다. 경험은 살아 있는 전체적 인간을 직접적으로 요구한다.


우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역사적-사회적 연관으로부터 겹겹의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이 가장 뚜렷해지는 형태가 바로 언어다.


여기서 의미하는 직접성은, 우리 인간들이 언제나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즉 결코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역사적-사회적 연관으로부터 겹겹의 영향들을 받는다. 우리는 언제나 그러한 영향들 아래 놓여 있다. 그 영향들이 가장 뚜렷해지는 형태가 바로 언어다. 언어는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사회적 과정에 의해 매개되어 있다.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매개된 채, 동시에 우리들의 모든 경험의 매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하지 않고는 경험들에 관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 속에서 비로소 우리들의 경험이 뚜렷해진다. 


만일 경험된 것이 ‘순전히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서 또는 ‘순수한 객체’로서 자신을 내보인다면, 그리고 그에 걸맞게 객관적으로 개념 파악된다면, 그것(경험된 것)은 물론 이미 온전한 의미에서의 ‘실제적 경험’에 다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된 것이 근대에서 시작된, 주체와 객체를 따로 분리시켜 온 그 빗장을 풀고 나왔을 때에만, 실제적 경험 속에 주어질 수 있다. 따라서 경험된 것이 ‘경험하는 인간’에게 문제가 되고, 그 인간을 변화시켜, 그 인간이 그 경험에 따라 이 세계 속에서 어떤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실존할 때에만 경험된 것의 실제성이 주어지는 셈이다. 


가다머가 본래적 경험이 갖는 성격, 즉 경험하는 인간에게 문제를 일으켜 그를 변화시킨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올바르다. 어떤 경험을 가진 사람은 그 이전의 그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세계를 다르게 본다. 그가 자신의 세계와 맺는 관계는 그 이전과는 달라진다. 그가 세계 속에 있는 방식의 이러한 변화는 이전의 상태에 비교해 보자면 부정적이다. 경험을 가진 이전과 이후는 더 이상 똑같지 않다. 옛것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성으로부터 어떤 새로운 긍정성이 나온다. 즉 모든 것은 새롭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달라진다. 


그러한 어떤 일이 일어날 때에만 우리는 한 인간에 관해, 그가 경험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고, 그는 이제 경험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경험된 것은, 경험 하는 우리를 새로운 영역 속으로 데려간다.


경험의 변화시키는 성격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다. 그 성격은 예컨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점차적으로 자라나 성숙될 수도 있다. 이러한 오랜 동안의 성숙은 그 성격에서는 ‘보통의 것’이다. 물론 경험들 중에는 한 인간을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아니 한 순간에 완전히 변화시켜 놓는 것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제7권에서 “vidi ― 나는 보았다”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직접성에 대한 커다란 증거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도 말한다. “Contremui amore et horrore”, 즉 “나는 사랑과 전율 속에서 떨었다”. 이것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커다란 증거다. 그러나 그것들은 차라리 ‘비범한 것’이고, 그러한 비범한 것들은 물론 종교적 경험의 역사적 삶 속에서 최고의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보통은 그러한 삶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의 현대 세계 속에서는 말해 무엇하랴!


무엇보다도 이러한 경험 개념은 여기서 증언된, 주체-객체-빗장의 철폐와 경험의 변화시키는 성격을 통해 실험적 그리고 경험주의적 과학들의 밑바탕에 놓인 그러한 경험 개념들과 현저하게 구별된다. 그 과학들에게 필수적인 객관성과 그것에게 속하는 이론적 성격에서 변화시키는 요소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경험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도 자신의 연구를 통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고,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과학에게는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 주체-객체-빗장은 높이 세워져 있으며, 이 빗장은 객체를 주체로부터 그것[객체]의 객관성 속으로 치워놓는다. 이러한 일은 과학에게는 매우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극단적인 경우로서 다음과 같은 가능성 ― 결코 필연성은 아니다 ― , 즉 한 인간이 객관적 앎의 많은 부분을 자신 속에 모으는 ― 그것도 그가 지배하는 객관적 방법론을 포함하여 ― 가능성을 허용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다른 부분에서는 완전히 경험이 없는 사람일 수 있고, 그러한 사람으로 머물 수 있다.


이것은 과학 또는 학문의 인간적 형성의 가치의 관점에서 본 근본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벨테의 “경험”에 대한 논의에서 그의 경험개념이 갖는 다음의 세 가지 요소들, 즉 ‘전체성’, ‘직접성’ 그리고 ‘변화’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본래적 경험의 요소들이 제대로 다 고려될 때 거기에는 종교적 경험이 들어설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근대의 세속화 과정을 통해 종교적 경험은 ‘경험’의 영역에서 탈락하기 시작한다. 그 탈락의 과정과 그 결과를 되짚어 보기로 하자.


▶ 다음 편에서는 ‘근대에서의 종교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참조 Bernhard Welte, Das Licht des Nichts (아무것도 없음의 빛), Düsseldorf 1980, 11 이하.


참조 앞의 책 13.


참조 같은 책 13 이하.


참조 같은 책 17 이하.


참조 같은 책 18.


참조 같은 책 18 이하.




[덧붙이는 글]
이기상 교수님의 ‘허무주의 시대와 영성 - 존재의 불안 속에 만나는 신(神)의 숨결’은 < 에큐메니안 >에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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